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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 앞에서 한 점에 불과한 인간
 대자연 앞에서 한 점에 불과한 인간
ⓒ 조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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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와 함께 걷느냐에 따라 길은 달라질 수 있다

"아일랜드 좋았어?"

한국에 돌아온 이후,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다. 좋다, 싫다로 대답해야 하는 이분법이 참으로 곤혹스럽다. 아일랜드는 물론 좋았다. 마음을 편하게 하는 목가적인 풍경도 좋았고, 낭만적인 리피강도 좋았고, 라이브 연주와 기네스 맥주를 함께 할 수 있는 주점도 좋았다. 하지만 좋은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 좋은 걸 혼자서 계속 즐길 수 있을까?

언제나 사람이 먼저인 것 같다. 여행지에서도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했다, 인생길에서 누구와 함께 걷느냐처럼. 아일랜드 여행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로 인해 내 생애 어떤 20일보다 더 잊을 수 없는 나날들이 됐다. 이쯤에서 로맨스를 기대하실 분이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여자 친구다. 스페인에서 장기여행 중인 그녀는 내가 아일랜드에 왔다고 하자, 선뜻 나를 보러 하늘을 날아 아일랜드까지 와준 것이다.

아일랜드에서 16일째, 한국으로 출국하기 4일 전. 나는 그녀를 마중하러 또다시 더블린 공항으로 향했다. 장난 삼아 그녀의 이름이 적힌 작은 피켓을 들고 입국장 앞에서 기다린 지 한 시간. 커다란 배낭가방을 메고 나타난 친구를 보니 어쩐지 헤어진 가족을 만난 것처럼 뭉클했다. 우리가 한국도, 스페인도 아닌 아일랜드에서 만날 줄이야.

더이상 새로울 것 없는 더블린에서 그녀와 함께 새로운 여행을 시작했다. 수없이 혼자 거닐었던 그래프턴 거리도, 이미 한 번 간 적 있는 템플바(라이브 연주를 하는 더블린의 유명한 주점)도, 리피강도 그녀와 함께하니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바로 전날, 그토록 강바람이 매섭게만 느껴지던 리피강을 그녀와 함께 거닐며 얼마나 크게 웃어댔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뭐가 그리 좋았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사진 찍다 휴대전화를 떨어뜨려 액정이 깨지고도 몰랐을 정도로 신 났다는 사실이다.

함께라는 즐거움
 함께라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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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휴대폰 카메라 액정이 친구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깨진 휴대폰 카메라 액정이 친구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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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감동을 안겨 준 가이드 아저씨와 까마귀

친구와 함께 새롭게 시작된 여행 이틀째. 아일랜드를 떠나기 전,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대자연의 위엄을 느낄 수 있을 법한 모허 절벽(클래어 주의 해안에 있는 200미터 높이의 거대한 절벽).

새벽 6시, 투어 버스에 오르니 로빈 윌리엄스를 꼭 닮은 인상 좋은 기사 아저씨가 우릴 맞았다. 아저씨는 기사와 가이드를 동시에 해내는 '능력자'였다. 단언컨대 그는 내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가이드로 기억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 마을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첫사랑 얘기를 들려주었고, 그 시절 불렀다는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자기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지닌 행복이 전해져왔다. 행복은 전염이 빠르다. 아저씨 덕분에 버스 안에 탄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이 금세 행복에 빠져들었다.

모허로 가는 3시간 남짓. 오른쪽 창밖에서는 햇빛이, 왼쪽 창밖에서는 빗줄기가 내리는가 하면 그 반대가 되기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더니 얼마 안 가 선명한 무지개가 보였다. 아일랜드에서 두 번째 보는 무지개는 내가 아닌, 멀리서 나를 보러 달려와 준 친구에게 아일랜드가 주는 선물인 것만 같았다.

창밖에는 무지개가, 차 안에는 기사 아저씨의 노래가 그리고 내 옆에는 내 삶의 도반이 앉아 있었다. 그녀와 나는 지난밤 술을 마시면서도 하지 못했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들을 담담하게 꺼내놓았다. 딱히 서로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때로는 그냥 들어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가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거센 바람에 솟구친 사람들의 머리카락.
 거센 바람에 솟구친 사람들의 머리카락.
ⓒ 조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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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허 절벽에 다다르자, 생각지도 못한 강한 바람이 불어 닥쳤다. 절벽의 절경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반대편 언덕을 올라야만 했는데, 걸음을 내딛기도 힘들 만큼 거센 바람이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고, 구토가 일 것만 같았다. 그런 내 곁으로 친구가 다가와 팔짱을 꼈다. 혼자일 때보다 앞으로 나아가기가 한결 수월했다. 사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중간에서 포기했을 게 분명하다.

정상에 오르자, 대서양의 거센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선 모허 절벽의 장엄함이 한 눈에 들어왔다. 역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고통이 뒤따르는구나 싶었다. 그때 내 시야에 들어온 검은 물체가 하나 있었다. 절벽 바로 앞에서 불어 닥치는 바람을 마주하고 있는 검은 물체가 처음에는 비닐봉지인가 싶었다.

자세히 보니 추락할 듯 다시 비상하는 그 검은 물체는 다름 아닌 작은 까마귀 한 마리였다. 한 발짝 내딛기 어려운 그 바람과 싸우는 녀석은 계속해서 비상을 시도했다. 바람이 살짝 잦아들면 다시 앞으로 나아갔고, 바람이 강해져 다시 밀리면 날개에 힘을 빼고 제 자리를 지키는 듯했다.

대서양의 북풍과 싸우고 있는 녀석의 비행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그리고 얼마나 내가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나를 돌아보게 했다. 말은 안 했지만, 친구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녀와 나는 여행길에서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을 함께 나눈 사이가 됐다.

누구나 상처는 있다

다음날, 친구는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갔고 결국 나는 아일랜드에서 마지막 밤을 홀로 보내게 됐다. 그날 저녁, 200원 때문에 나를 울린 할머니가 이번에는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할머니의 차로 집까지 가는 20여 분간, 우리는 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눴다. 첫 만남에서 나는 할머니께 작은 성탄 선물과 카드 한 장을 드렸는데, 카드 속에는 그동안 내 상처들에 대한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관련기사 : 아일랜드에서 만난 '200원'... 펑펑 울었습니다 )

"네 카드 읽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단다."

할머니의 첫 마디가 큰 위로가 됐다. 누가 봐도 견디기 어려운 일들을 우리는 살면서 겪곤 한다. 내 경험으로 그때, '시간이 약'이라거나 '누구나 그런 일을 겪는다'는 말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너는 남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니?'와 같은 말은 최악이다. 가장 좋은 위로는 공감해 주는 것이다. 같이 화내주고 슬퍼해 주는 것 말이다.

할머니는 먼저 내 이야기에 공감해 주셨고, 그 뒤에는 자신의 깊은 상처를 꺼내 보여 주셨다. 그녀에게는 열아홉 살에 짧은 생을 마감한 아들이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병마와 싸우던 자식을 결국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도 가슴을 친다.

75세임에도 세련되고 지적인 데다가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온화하게만 보였던 할머니였다. 그런 그녀에게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이 있었다니. 그녀 앞에서 인생의 반도 안 산 내가 상처를 운운하고 있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주문처럼 내게 이야기했다.

"너는 운이 좋은 사람이야. 더 나쁜 일을 겪기 전에 멈췄으니. 그리고 네겐 앞으로 행복한 일만 생길 거란다."

나는 마치 주술사가 해주는 이야기처럼 그녀의 이야기를 되새겼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그녀의 집에 다다르자, 그게 사실임을 깨달았다. 85세가 된 할머니의 남편은, 4년 전 프랑스에서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나는 할머니의 딸과 사위, 손자, 손녀 등 20여 명과 함께 하는 가족 파티에 초대된 것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노래를 배운다는 손녀는 내게 노래를 불러 선물했고, 할아버지는 고인이 된 우리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줄 양아버지가 되어주겠노라고 하셨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 이런 것일까? 아일랜드에서의 마지막 밤, 나는 가슴이 벅차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내가 가진 힘을 일깨워 준 아일랜드 할머니
 내가 가진 힘을 일깨워 준 아일랜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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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돌아와 곰곰 생각해 보았다. 할머니와 나는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돌이켜 보니 우리는 유난히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할머니의 손자 중 한 명인 장애인에서부터 굶주리는 노숙자들, 인종 차별에 이르기까지. 늘 결론은 같았다. 사람은 다 똑같다, 그러니 그 부조리를 바로 잡아야 한다!

"힘을 키워야 해."
"맞아요. 힘을 키워야겠어요."

할머니는 잠깐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넌 이미 힘을 가졌잖니? 넌 저널리스트잖니?"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언젠가부터 달라진 방송환경만을 탓해 왔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내 자신이 떠올라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도 할머니의 말씀은 잊히지가 않았다.

'넌 이미 힘을 가졌잖니?'

영화 속 회상 장면처럼 반복해서 메아리쳐 왔다. 당시 아일랜드에서 산 작은 공책에, 그동안 보고 듣고 경험한 부조리들을 소설로 쓰고 있었던 나였다. 픽션으로 완성하는 게 목표였던 내가 기사화한 이 글을 먼저 쓰게 된 것은 할머니의 영향이 가장 컸다.

세상을 바꾸는 힘, 용기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방송가 갑을 문제에 대해 기사를 쓴 뒤, 생각해 보았다. 왜 이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지에 대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문제를 개인 인격 문제로 접근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따지면 사실 진정한 갑도 없다. 갑이라 부르는 이들도 사주 입장에서는 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을 중에서도 갑질하는 을들이 얼마나 많은가.

갑을 문제에 대해서 좀 더 크게 바라보자. 방송가의 프리랜서들은 상당수 경제적 논리에서 파생되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IMF를 전후해 방송 인력은 급격히 늘어갔지만, 정규직 PD 대신 계약직 PD가, 계약직 대신 프리랜서 PD가 자꾸만 그 자리를 메웠다.

애초 소수의 프로그램에만 초빙해서 쓰던 작가들의 인력이 급격히 늘었지만, 계약하는 관행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계속되는 경제 불황은 제작비 감소로 이어지고, 프로그램이 없어지거나 제작비가 줄면 군소 외주제작사의 부담은 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파트너십이 가능할까?

방송만큼 파트너십이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싶지만, 또 방송만큼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심각한 데도 그 심각성이 조명 받지 못하는 곳도 없다. 2년 이상 비정규직으로 근무할 경우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비정규직 법안이 시행됐을 당시, 정규직 전환을 막기 위한 행태가 방송가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역설적이게도 당시 그런 행태를 고발하는 방송을 제작하는 비정규직 스태프들에게 사업자 등록을 하도록 하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들은 공론화되지 못한 채 묻혔다. 방송가의 노동환경이 개선되지 못하는 데는 일정 부분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제대로 알리지 못한 노동자들의 책임도 있다. 물론 대체 인력이 워낙 많다는 점에서 불이익을 감수하고 알린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 역시 실명을 밝히고 방송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이 따랐다. 그만큼 이 세계가 좁은 곳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용기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사실 방송가에서 겪는 일들은 이 시대에 어떤 직업을 가졌건 우리가 겪는 모순이고 부조리가 아닐까.

결국 지금 우리가 침묵한다면, 이런 희망 없는 세상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다는 참담한 현실 직시, 그게 바로 내가 용기낸 진짜 이유다. 아주 오랫동안 세상의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항상 그 탓을 밖으로만 돌려왔다. 대통령에게, 정치권에, 기득권자들에게. 누군가를 탓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아일랜드 할머니가 일깨워준 세상의 부조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힘, 나는 다시 그 힘을 믿어보고 싶어졌다.

덧붙이는 글 | 20일간의 아일랜드 여행기를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특히 생면부지의 기자에게 원고료로, 쪽지로, 댓글로 뜨거운 응원을 보내주신 분들께는 또 다른 글로 응원에 답할 수 있도록 살겠습니다.



태그:#아일랜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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