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더블린의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마켓
 더블린의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마켓
ⓒ 조미진

관련사진보기


아일랜드 여행 2주차. 때는 바야흐로 서양 최대 명절인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성탄절은 가족과 함께'라는 예외 없는 공식이 성립하는 이곳에서 이방인인 나는 점점 더 고독해졌다.

그럴 때마다 작은 노트 한 권에 써내려가는 나의 이야기는 속도를 더했다. 하지만 이미 컴퓨터 글쓰기에 익숙해진 내게 친필 원고라니,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 여행 일정을 열흘로 잡고 노트북을 챙겨오지 않은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글 쓰는 게 직업이요, 취미요, '힐링'까지 도와주는 최고의 친구지만, 사람이 미치도록 그리운 건 사실이었다.

고독한 이방인, 사람이 그리웠다

템플바의 매력적인 플룻 연주자
 템플바의 매력적인 플룻 연주자
ⓒ 조미진

관련사진보기


더 이상 아일랜드에서 만날 사람이 없을까?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딱 한 명 있기는 했다. 75세 노인, 그것도 단 한 번 만났을 뿐인 아일랜드 할머니였다. 그녀와의 만남은 4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조금 늦은 나이에 떠난 유럽 배낭여행. 더군다나 어릴 적부터 동경해 오던 예술과 낭만의 도시, 프랑스 파리라니….

술을 마시지 않아도 그 분위기에 취해 비틀거리고는 했던, 몽마르트 언덕의 어느 식당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행에서 만난 일행과 함께 생애 첫 달팽이 요리를 먹으며, 맛있긴 하지만 달팽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우리 일행의 옆 테이블에 앉은 노부부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에서 왔니?"
"우린 한국에서 왔어요. 당신들은요?"
"우리는 아일랜드에서 여행 왔단다."

그렇게 일면식을 가진 뒤, 몇 마디 대화를 조금 더 나눴다. 할머니는 아일랜드와 한국의 분단 상황에 대해 안타까워하셨고, 나는 아일랜드의 문인들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같다. 일행 중 한 친구는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할머니께 100원짜리 동전 2개를 기념이라며 선물했다.

"정말 작은 돈이에요. 그래도 기념으로 간직해 주셨으면 해요."

200원을 받아 든 할머니는 큰 선물을 받은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린 그렇게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보통 여행지에서 만나는 인연은 여기까지가 끝인 경우가 많다. 할머니와 나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유럽에서 돌아온 나는 할머니에게 사진을 메일로 보내드린 뒤,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그런데 할머니는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잊지 않고 안부 메일을 보내주셨다. 그렇게 4년이 흘렀고, 나는 우연히 그 할머니의 나라에 오게 됐다.

'혹시나 할머니를 살아 생전에 한 번이라도 더 뵐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작은 기대로 메일을 보냈다. 할머니는 이런 깜짝 선물이 어디 있냐며 흔쾌히 만남을 수락하셨다.

200원 때문에 나를 울린 75세 할머니

단돈 200원에, 당신은 울어본 적이 있나요?
 단돈 200원에, 당신은 울어본 적이 있나요?
ⓒ 곽우신

관련사진보기


스파이어(바늘 모양의 거대한 첨탑)는 더블린에서 보통 청춘들 사이 만남의 장소로 애용된다. 이곳으로 약속 시간보다 20분쯤 먼저 나갔다. 할머니를 만난다는 설렘이 컸지만 복잡한 마음도 스쳤다. 고령이신 할머니는 얼마나 연로해지셨을지 마음이 짠해졌고, 할머니와 1대 1로 만나 영어로 대화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까지 받았다. 일단 할머니를 만나면, 드릴 인사말부터 영어로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오, 마이진! 이게 얼마만이야?"

할머니는 영어로 'MIJIN'인 내 이름을 여태 '마이진'으로 알고 계셨다. 건강한 모습의 75세 할머니가 내 눈 앞에 서 계셨다. 나는 생각해 둔 영어 인사말을 모두 잊고, 할머니와 부둥켜안았다. 역시나 정말 좋은 순간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그렇게 얼마쯤 흘렀을까, 할머니가 가끔씩 찾는다는 조용한 식당으로 안내했다.

"믿을 수 없어! 정말 꿈인 것만 같아."

할머니와 나는 같은 말을 번갈아가며 내뱉었다. 그 후 할머니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꼭 우리나라 할머니들이 쌈짓돈을 보관할 때 쓰는 동전지갑 같았다. 지갑 속에서는 은색 동전 2개가 나왔다. 동전은 다름 아닌 한국 돈 200원. 할머니의 손에 올려진 200원을 보니, 오래 전 기억이 떠올랐다. 기념으로 간직해 달라던 우리 일행의 말을 할머니는 흘려듣지 않으셨던 것이다.

'나한테 보여주시려고 저걸 찾아서 가지고 오셨구나!'

가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게 올라와 목까지 차고 올랐다.

"난 너희가 이걸 준 그 날부터 항상 간직했단다. 항상, 항상."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결국 목까지 차고 오른 뜨거움이 눈에서 흘러 내렸다. 여행지에서 단 한 번 스쳐 지났을 뿐인 인연을 이토록 소중하게 생각해 주시다니…. 나는 유난히도 조용한 그 식당에서 창피함도 잊고 그만 펑펑 울어 버렸다.

한국에서 받은 상처들로 뾰족해질 대로 뾰족해지고,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졌던 내 마음이 그 순간 둥글고 따스하게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주문을 하고 식사가 나올 때까지도 나는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할머니는 조용히 내가 다 울 때까지 기다려 주셨다.

드디어 식사가 나왔다. 할머니와 나는 비싼 연어 스테이크와 스파게티를 반도 먹지 못하고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그다지 영어를 잘하는 편이 아니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할머니도 얼마 안 되는 내 외국인 친구들과 똑같은 말을 했다. 영어는 언어(language)가 아니라 소통(communication)이라고. 중요한 건 문법이나 단어가 아니라, 서로를 향한 따스한 마음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대학 졸업 후, 제대로 영어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할머니 손자들의 근황은 물론이고 국제 정세에 대해서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쉴 새 없는 수다 속에 1시간 30분이 흐르자, 할머니는 가족들 때문에 집에 돌아가야만 한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일랜드에서 성탄 연휴는 가족들과 함께 해야만 한단다. 나는 가족들이 있어 행복하지만, 때론 책임감 때문에 힘들기도 해. 너를 이렇게밖에 볼 수 없어서 너무 슬프구나. 하지만 어쩌겠니? 그게 인생인 걸."
"그럼요, 그게 인생이죠."

나이 차이와 국적, 언어. 어느 것도 문제될 게 없었다, 할머니와 내가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가 되는 데는 말이다. 와인 한 잔과 맥주 한 잔을 마신 우리는 팔짱을 끼고 더블린 밤거리로 걸어 나왔다. 불법주차를 했다는 할머니가 음주운전을 하기 위해 세워둔 자동차를 찾아가는 동안, 우리는 한 차례 불법을 더 저질렀다.

여느 아일랜드 사람들처럼 횡단보도의 신호등을 무시한 채 당당하게 건넌 것. 그리고는 얼굴을 마주보며 어린 아이들처럼 키득키득 댔다. 할머니는 4년 만에 내 이름을 제대로 알게 되셨다.

"미진, 다들 신호를 지키지 않아. 그게 아일랜드 사람들이니까."
"그럼요, 여긴 아일랜드인 걸요."

할머니는 내가 떠나기 전에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말을 남긴 채, 차에 올라타셨다. 내 생애 이토록 따스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또 있을까? 할머니의 차가 멀어지고도 한 동안 나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20일간의 아일랜드 여행(2014년 12월 9일~30일)을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



태그:#아일랜드, #방송가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