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기원 축구 전문 캐스터 ⓒ 스포츠피플21 이원영
"한국 대 포르투갈전은 생중계로 못봤어. 그 시간에 다른 중계하느라고."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서기원 캐스터의 방송을 볼 수 있었다. 모 스포츠TV에서 재방영한 미국 대 폴란드 전. 정확한 발음,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일정한 목소리 높이. 군더더기 없이 차분하게 상황만 전달하는 모습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요즘과는 너무 다른 밋밋하고 건조한 중계. 하지만 오히려 신선하다는 느낌이 든 이유는 뭘까. 30년이 넘도록 재미 없는(?) 축구 중계를 고집하는 서기원 캐스터. 그는 최근 축구 중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골이 들어가면 해설자, 아나운서가 합창을 해. 난 아주 그게 듣기 싫어. 그리고 자기가 분위기를 이끌거나 만들려고 해서는 안되지. 텔레비전 보는 사람도 와- 하고 그러는데, 해설자가 무슨 얘기하는지 들어? 안 듣는다구. 들리지도 않아. 그런데 쓸데 없는 얘길 한다구."- 요즘 언론에서 축구 열기를 부풀리는 측면이 있다."그게 조금 불만이야. 신문도 그렇지만 방송도 요즘 축구 중계를 오락쪽으로만 밀고 간다구. 이 해설자 저 해설자 서로 경쟁을 시켜 가지고, 부추겨 지금. 그러니까 그냥 소리 지르고 아우성 치고..." - 당신이라면 어떻게 중계하겠는가."차라리 가만히 있겠어. 그 순간을 즐길 수 있게. 그거 얼마나 신나는 일이야. 물론 내가 모범답안이라는 얘기는 아냐. 내 약점이 흥분을 못하고 재미있게 못한다는 것도 알구. 하지만 시청자들이 커피도 마시고 홍차도 마시고 쥬스도 마시고, 그렇게 골라서 볼 수 있게 돼야 하거든.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 좋은 거 아냐. 한 사람한테만 집중되면 문제가 없어? 그런데도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잖아. 이건 그냥 똑같이 와- 한다구. 그게 조금 나는 안 좋아."- 재미를 무시할 수는 없는데."물론 재미가 있어야지. 심지어 축구는 오락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 그렇다고 해서 중계하는 사람이 말로 재미 있게 만든다고 해서, 축구 자체가 재미 있어지는 건 아니거든. 축구의 진정한 재미를 일깨워 주는 게 아니고, 분위기만 이렇게 만들어 준다는 거야. 뭐 심하게는 부화뇌동하는 거 아냐. 옆집에서 와- 하니까 나도 와- 해보자는 얘기란 말야. 그러니까 거품이 된다는 거야."- 축구에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재미는 어떤 것이 있는가?"요즘 TV가 좋아서 클로즈 업할 때 보이는 선수들의 얼굴, 얼마나 진지해. 그리고 그 몸 사리지 않고 태클 들어가고, 뭐 경기 끝나면 다 지쳐서 운동장에 널부러져. 그렇게 최선을 다하고 진지하고. 심지어는 그런데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경기거든.축구 안에는 좋은 정신이 있다구. 우리가 괜히 스포츠 하는 게 아니라구. 물론 즐기는 것이 1차적인 목적이지만, 즐기기만 하려면 도박을 하든지 다른 걸 할 수 있지. 스포츠를 하는 이유는 즐기면서도 얻을 수 있는 게 있기 때문이거든. 신체단련이란 것도 있지만 정신적으로도 플러스가 되는 게 많아요. 그걸 어떻게 오락 수준으로만 몰고 가느냐는 거지."- 결국 시청률 경쟁 때문에 생기는 일 아닌가."캐스터와 해설자는 광고와 시청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방송국의 경향을 따를 수밖에 없지. 그래도 각 방송국 이미지가 있는데 왜 모두들 똑같이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좀 의연했으면 좋겠어. 요새 아나운서나 해설자들 동정이 간다고. 얼마나 시청률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까. 적게 본다 많이 본다 차이 갖고 잘한다 못한다 평가하는 건 잘못된 거야."
ⓒ 스포츠피플21 이원영

- 자신의 방송 철학은?"방송의 기능은 세 가지야. 오락, 교육, 보도. 그런데 스포츠 중계에 다 들어 있거든. 재미가 있으니까 오락적 기능이 있다고 할 수 있지. 그 시간에 벌어지는 일을 바로 알려주니까 보도적 기능이란 말야. 그 다음에 교육적 기능이란 것은 해설자가 경기를 설명해주면서 우리가 얻어갈 것을 지적해주잖아. 물론 다른 프로그램에도 세 가지가 들어가지만, 스포츠만큼 골고루 포함돼 있지 않아. 그래서 내가 스포츠를 좋아하고 스포츠 중계를 해온 거야.따라서 재미 있는 방송을 해야 하지만, 경기 자체에서 재미를 찾자는 게 내 꿈이야. `말장난으로 재미 있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거지. 그리고 보도적 기능에 따라 정확하게, 신속하게, 공정하게 방송해줘야 되지. 박지성이가 넣는데, 다른 사람이 넣었다고 하면 오보 아냐."- 상당히 정확히 방송하는 캐스터로 알려져 있는데."그렇지도 않지만, 남들이 그렇게 봐주는 거야(웃음). 우선 누구든 알아 들을 수 있는 쉬운 말을 쓰자는 거야. 유치원 아이들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초등학교 못 나온 사람부터 박사까지 다 보는 거 아냐. 그리고 가능하면 말을 짧게 짧게 한다구. 단문을 쓰지. 말을 길게 하다 보면, 자기 말에 자기가 말려 들어서 결론이 거꾸로 되는 경우도 있다구(웃음)."- 평소 방송 준비는 어떻게 하는가.
ⓒ 스포츠피플21 이원영
"중계가 있으면 제일 먼저 출전 선수 명단, 프로필 그리고 출전팀의 전적을 챙긴다구. 이런 것들은 기본적인 자료고, 빠짐 없이 해야 하는 일이지. 그리고 평소에 축구 관계 기사나 자료를 읽지. 나는 다른 책은 안 봐도 축구 관계 책은 일주일에 두-세번 책방에 가서 사보고 그래. 그래서 그런 자료는 메모를 해봤자 언제 써먹을지 모르잖아. 상황, 상황이 다르니까. 가능하면 머릿속에 입력을 시킨다구. 그래야 자연스러운 멘트가 분위기에 따라 나오게 돼."- 일일이 다 외운다는 말인가."그러려고 하는데 지금은 그게 조금 어려워. 아무래도 옛날하고 기억력이 다른데, 그래서 `그런 일이 있었죠?` 정도 밖에는(웃음)..."- 그런데, 경기가 끝나면 스코어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왜 그런가."그때 그때를 아주 동시에 전해 줘야 된단 말야. 보도의 신속성이지. 스포츠 중계는 대본이 없잖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보통 집중력이 필요한 게 아냐. 그리고 경기에 몰입도 해야 하지만, 주변 분위기도 파악해야 된다구. 관중들의 움직임이나 열기, 벤치의 행동이라든지. 그래서 잡념이 끼어들 틈이 없어. 경기가 끝나잖아? 딱 마이크 놓고 돌아서면 누가 언제 어떻게 골을 넣는지 까맣게 잊어 버려."- 선수들과 식사를 잘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가까워지면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으니까. 사람 감정이라는 게 그렇거든. 내가 늦어도 경기장에는 방송 1시간 전에 도착해요. 그때는 출전 선수나 감독은 가능하면 안 만난다구. 만나서 얘기라도 몇 번 하면 편파적인 방송이 될 수 있거든. 나로서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방송을 하려는 뜻인데, 뭐 꼭 그렇지도 않아. 나도 좋아하는 선수 있고. 예전에 선수 하던 친구들 요새 만나면 아주 반갑지."- 보도적 기능에 따른다면, 선수가 실수 했을 때 `실수 했다`고 끝나면 되는 것 아닌가. 요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대부분 나이가 서른도 안된 젊은이들이 그 엄청난 경기에 얼마나 부담스럽겠어. 그걸 이겨내는 건 보통 힘든 게 아냐. 축구하는데 슛은 10번에 1번 들어갈까 말까 한 거 아냐. 잘못할 수도 있는 거지. 당연한 거야. 물론(골인이 안되면) 아깝지(웃음). 하지만 실수한 선수가 얼마나 부담스럽고 주눅 들겠어. 그리고 선수 가족도 있잖아. 그 사람들 생각도 해야지. 함부로 말하는 건,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거 아냐. 이건 축구 정신에도 위배되는 거야.그래서 어떤 친구가 `잘못한다`, `아 저러면 못쓴다` 그런 얘기는 가급적 삼간다구. 하지만 칭찬은 아끼지 않아. 잘한 건 잘했다고 그런다구. 그대신 비 신사적인 플레이를 하는 친구들, 더티 플레이를 하는 친구들, 페어 플레이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친구들한테는 야단 좀 치지. 저러면 못 쓴다구. 그거는 내가 못 참아(웃음)."- 점점 캐스터와 해설자의 관계 설정이 애매해지는 것 같다.
▲ 서기원 축구 전문 캐스터 ⓒ 스포츠피플21 이원영
"캐스터는 상황 전달. 해설자는 분석, 경기 내용 분석, 평가, 예측 이런 거 아냐. 역할 분담은 해야지. 요즘 해설자가 중계 하는 경향이 더러 있더라구. 캐스터에 앞서서 `골인입니다`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거는 내가 생각하기에 영역 침범이야. 또 반대의 경우도 있지. `아, 저거는 나쁜 패스입니다`. 물론 나도 가끔 그러는데. `아- 저런 때는 다른 사람한테 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가 돼야지. 물어 봐야지, 자기가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지. 그러면 해설자가 필요 없잖아. 그런데 요즘은 그게 서로 넘나들더라구."- 전혀 성격이 다른 방송을 하는 사람이 스포츠 캐스터를 겸업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쇼같은 오락 프로그램을 했던 사람이 뉴스나 스포츠를 한다는 것은 조금 아쉽다구. 근데 요즘 그렇게 되가고 있는데, 나는 참... 그게 바로 스포츠의 오락화... 입빠른 소리인지 모르지만 앞으로 개그맨도 중계할 수 있어. 못하란 법 없잖아. 개그맨이 잘 하지 못해서 안된다는 얘기가 아냐. 개그맨은 개그맨의 분야가 있잖아. 각 분야를 존중해줘야지. 이제는 전문가 시대인데, 우리는 전문가를 키우고 우대하는데 조금 소홀해.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스포츠 중계하겠다는 사람은 그것에 대한 자기 철학과 소신이 있어야 되는 거야. 나는 스포츠는 스포츠고 축구는 축구야. 그속에는 정신이란 것이 있다고. 우린 그 정신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는 거야. 재미를 무시하자는 게 아니고, 재미만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얘기지."- 한국 대 포르투갈전을 생중계로 보지 못했는데, 혹시 아쉽지 않았는가."뭘, 재방송으로 봤는데. 경기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니까. 이놈들이 어떻게 뛰는가, 어떤 태도로 경기에 임하는가... 이번 월드컵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걸 배웠어. 프랑스,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아마 모르긴 해도 밑바탕에는 역시 `쯤이야`하는 자만심이 있었을 거라고 믿어. 경기에 들어가서 얼마쯤 해보다가 `어구 이거 아닌데, 야 정신 차리고 잘해야 되겠다`해도 그건 안되거든. 이미 지나간 거야. 그래서 경기에 임할 때 정신 자세가 그렇게 중요하지. `역시 스포츠에서는 자만해서는 안된다`, `그게 이번에 겉으로 나타난 거다`, 그렇게 해석을 하지. 이번에 우리도 자만할까봐 걱정이야. 문제점이 나타났어야 하는데, 오히려 감춰졌을 수도 있다구. 나는 지금 이 거품이 언제까지 갈 건지...걱정이야. 붉은 옷 입고 와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동안 축구장에 한번도 안 가본 사람들이야. 공 한번 안 차본 사람들이라구. 이번 기회에 그런 사람들이 축구를 좋아하게 된다면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지만, 이 열기가 얼마나 갈 건가..."

"요즘 내가 지하철을 공짜로 탄다구"
TV 브라운관을 통해 지켜본 서기원 캐스터는 바른 말만 하는 모범생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래서 꼬장꼬장하고 딱딱한 인터뷰가 되기 쉬울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대하는데 별다른 거리감을 두지 않았고, 좀처럼 하기 쉽지 않은 얘기까지 시원 시원하게 대답했다. 서기원 캐스터의 소탈한 일면을 읽을 수 있는 몇몇 대화를 소개한다.- 얼마전 TV광고를 통해 목소리를 들었을 때 무척 반가왔다."아유- 내가 그것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다구. 뭐 그런 걸 다하느냐구(웃음). 그런데 아- 그 사람들 여태 전화 한마디 없네."- 무슨 말인가?"돈을 받아야 되는데 말야(웃음). 아- 글쎄 연락이 없어. 애들한테 전화해서 야, 왜 안 주냐 그럴수도 없고. 난감한데?(웃음)"- KBS에서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퇴직했던 것으로 안다."어떻게 알았어? 분당 아파트를 신청해서 당첨이 됐는데, 중도금 내야지 뭐 내야지. 빚이 자꾸 쌓이는데 어- 이게 장난이 아니더라구. 이자로 월급 다 나가구, 도저히 안되겠는 거야. 돈도 아쉽고 그때 내가 아주 건강도 나빴어. 미국 월드컵에서 하도 고생을 해서, 당뇨가 생겼거든. 그래서 명예 퇴직 신청을 했지. 그래 빚 갚고 나니까 돈이 하나도 없어. 퇴직금이. 그래서 지금까지도 내가 벌어야 살잖아. 벌어 놓은 게 없으니까, 겨우 집 한 채 건진 거지. 뭐(웃음)."-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아 놀랐는데. "아냐. 차가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운전 면허가 없다니까. 내가 운전 자체를 못해요. 마누라가 하는데 뭐 나까지 또 해. 옛날에 한참 일할 때는 피곤하잖아. 거기에 운전까지 해봐. 그래서 마누라가 나를 데리고 다녔다구. 출장도 늘 같이 다녔다구. 그러니까 필요가 없는 거지(웃음). 그런데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마누라가 꾀가 나는 모양이야(웃음)."- 그래도 방송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아냐. 나는 전혀. 요즘 내가 지하철을 공짜로 탄다구(잠시 무슨 말인지 언뜻 다가 오지 않아 침묵 그리고 웃음). 하하 민망해서 가능하면 지하철은 잘 안타구 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난 전혀 그런 거 개의치 않아. 옛날부터 나 자신을 인기인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어. 직업인이지. 전문가지. 인기인이 아니지. 나를 인기인으로 생각해 주는 게 달갑지 않다구. 인기인이라면 몇 년 그저 인기 있을 때만 일하는 거 아냐. 나는 그래서 썩 좋아하지 않는다구."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스포츠피플21(www.sportspeople21.com)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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