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승한 코치ⓒ SP21 이혜준
프롤로그 어머니는 몽둥이를 쥐어주며 말했다. 네가 얻어맞은 만큼 때려주라고. 그 전에는 집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소년의 집 앞으로 이웃들이 밤늦게 몰려올 때까지, 초등학교 3학년 아이는 그저 대문 앞에서 울 수밖에 없었다. 소년에겐 아버지가 없었다. 아버지가 없는 소년은 강해야 했다. 어느 날 소년은 조각칼에 손바닥을 크게 베이고 말았다. 하지만 소년은 조그만 손을 꾹 모아쥐고만 있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창피했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렇게 자라났다.소년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중학생들의 힘찬 함성과 그들의 손에 들렸던 길다란 막대기. 무슨 운동인지도 몰랐지만, 가슴은 쿵쾅댔다. 오직 자신도 해야만 하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할 뿐. 그렇게 소년은 아이스하키에 빠졌다. 타고난 운동 신경, 그리고 유난히 승부욕이 강했던 소년은 마침내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 수 있었다.하지만 아이스하키로 미래까지 그릴 수는 없었다. 실업팀이 단 하나도 없던 시절, 소년은 군대를 가야 했다. 하지만 이대로 아이스하키 스틱을 놓기는 너무 억울했다.
"언제까지 두들겨 맞는 운동할래"/스포츠피플21 이혜준

제대하자마자 소년은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말로만 듣던 세계 최고 수준의 NHL(National Hockey League, 북미 아이스하키 리그)의 LA킹스 등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엄청난 실력 차이, 3년의 공백기. 소년은 절망에 빠졌다.그렇다고 이대로 아이스하키를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NHL 소속팀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깨 너머로 지도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이제 그만 집안 일이나 도와라", "죄송합니다. 저는 못합니다". 결국 소년은 편지 한 장만을 남겨두고 몰래 고국으로 돌아왔다.그리고 소년은 26년만에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이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전에 어머니와 헤어졌던 아버지. 그런데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눈물이 떨어졌다. 소년의 아버지도 아이스하키 선수였다."언제까지 맨날 두들겨 맞는 운동할래?"
ⓒSP21 이혜준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얼굴이 어둡다. 휑한 형광등 불빛아래 싸늘한 침묵만 흐른다. 신승한 코치(34세)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언제까지 맨날 두들겨 맞는 운동할래?"확실히 대표팀은 일방적으로 밀렸다. 제대로 슈팅 한번 못 날리고, 거푸 3골이나 허용했다. 상대는 경복고등학교 아이스하키부 OB팀. 비록 아저씨들이지만, 모두 쟁쟁한 선수 경력을 갖고 있는 강팀이다."할 수 없어, 이제. 안 되는 놈들 게임도 뛰지 마. 남들이 봐 갖고 빌빌 웃는 정돈데, 무슨 게임을 뛰어?"신 코치가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을 맡은 것은 1998년 11월. 그전까지 그는 '불패의 감독'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사람이다. 신 코치가 이끌던 홍익초등학교는 중학교 팀도 꺾기 힘들 정도였다. 누가 보더라도 잘 나가던 감독, 하지만 그는 지도자 생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아이스하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종목이 학부모의 지원으로 운영됩니다. 지도자 급여도 포함되죠. 감독의 목줄을 쥐고 있는 학부형과 잘 지내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어요. 지도자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치도 잘해야 한다는 얘기죠. 그런데 저는 술을 못하거든요(웃음)."'정치'를 잘하기 위해 NHL팀들을 따라다닌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어머니를 미국에 두고 혼자 귀국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신 코치에게 탈출구이자 해방구로 다가왔다."무엇보다 순수해서 좋았어요. 학부형들과 연관이 없으니까요. 지금도 지가 좋아하니까 건강 삼아 하도록 놔두는 거지, 운동 선수로 키우고 싶다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체육계에서 가장 이례적인 실험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가장 선진적인 팀입니다."그러나 앞서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99년 동계 아시안 게임이 끝나자, 대표팀은 남의 나라팀이 되고 말았다. 어떤 장비도 지원되지 않았고, 마땅한 훈련 장소도 구할 수 없었다. 아이스하키를 그만두는 선수들을 잡을 명분 또한 없었다.신 코치는 뛰어다녔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대표팀 훈련 보고'를 하기 시작했고, 훈련 장소를 구하기 위해 선수촌과 아이스하키 협회 등을 문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덕분에 그는 선수촌 훈련과에서 '알아주는 고집통'으로 소문이 났다. 그리고 신 코치는 더욱 당당하고 싶었다."일단 내가 갖출 건 다 갖춰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급 지도자 자격증도 그래서 취득했어요(현재 전체 아이스하키 지도자중 1급 자격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신 코치를 포함해서 4명뿐이다). 그런데 정말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지도 방법을 확 바꾼 계기가 됐어요. 지도자는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교육을 많이 받아야 하고, 책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우선 자기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하죠."남을 다스린다는 것은 확실히 어렵다. 현 대표팀은 더욱 그렇다. 앳된 여학생부터 주부까지, 나이도 각각 직업도 각각이다. 대표팀에서 처음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한 친구도 있고, 어려서부터 운동 선수로 자란 친구도 있다. 게다가 지원은 열악하다."아무래도 응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양의 탈을 쓸 필요가 있습니다(웃음). 선수들한테 좋은 사람이라고, 선수들에게 좋은 지도자가 되는 건 아닌데..." 사랑하는 가족에게 '좋은 가장'이 되주지 못하는 점도 맘에 걸린다. 무릎을 꿇어서라도 반드시 결혼하고 싶었던 아내, 그리고 두 아이. 돈도 많이 벌어다 주지 못하고, 얼굴도 자주 보여주지 못한다. 그는 밤에 대표팀을 만난다. 낮에는 서울시 체육회와 협회에서 아이스하키 행정 업무를 돕고 있다. "(아내와) 위기가 왔었죠. 참다 참다 끝내 터진 겁니다. 하지만 싸우고 그런 건 없습니다. 뭐 다 내 잘못인데요."'야간 과외'가 가족에게 돌려주는 혜택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대표팀 코치 생활은 얼마 되지 않는 월급 봉투를 더욱 얇게 만들 뿐이다. 결국 얼마 전 신 코치는 처갓집으로 들어가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그렇지만 대표팀을 처음 맡을 때 다짐했던 '초심'을 잃고 싶진 않았다."사실 그 동안 몇몇 운영이 잘 되는 팀에서 지도자로 와 달라고 했어요. 그때마다 조건을 걸었습니다. 학교에서 급여를 책임져 달라구요."현실적으로 학교측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 '가지 않겠다'는 얘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명예나 돈보다 더욱 소중한 무엇이 대표팀 생활에 있다는 것. 신 코치는 무엇을 얻고 있을까. 그는 '불패의 감독 시절'에 미처 깨우치지 못했던 교훈들을 하나 하나 얻어가고 있다."스파르타식으로 훈련했어요. 화려한 개인 기술을 전수하는 데만 너무 치우쳤죠. 그래봐야 전체 인생에서 선수 생활은 짧은데, 아이들이 그때문에 잘못된 성장기를 보내게 되지 않았을까, 어린 아이들에게 너무 일찍 승부욕을 가르친 것이 아닌가... 제일 많이 후회합니다. 저도 자식을 키우다보니 많이 생각하게 되더군요."
ⓒSP21 이혜준

- 그때와 어떤 점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세요?"옛날에는 상대팀과 싸우는 줄 알았습니다. 적이 상대방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 게 아니더라구요. 적은 항상 우리팀에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이기는 것보다 우리팀을 이기는 게 더 어려워요."- 무슨 말씀이신지... 정말 어려운데요."사실 상대에게 이기려고만 한다면, 방법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래서 승패보다는 '우리끼리 만족할 수 있는 하키를 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너 때문에 골을 먹었다. 내가 잘해서 골을 넣었다', 이래서는 모두가 만족할 수 없습니다. 단체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스하키의 세계는 무궁무진합니다. 할수록 재미가 나야 하는 운동이죠."'아유... 뭘...'신 코치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자주 사용했던 말이다. 그는 수줍음을 많이 탔다. 스스로 말을 많이 하지 않았고, 그래서 질문을 자주 던져야 했다. 하지만 아이스하키 얘기가 나오자 달라졌다. 그의 말을 따라가기에 펜놀림이 너무 느렸다."그래서 지도자는 자기 색깔로 선수를 맞추려 해서는 안됩니다. 팀 구성원들에 따라서 자기 색깔을 변화시킬 줄 알아야해요. 스포츠는 정답이 없습니다. 스케이트는 이렇게 타라, 뭐는 이렇게. 일괄적으로 맞추려 하지 말고, 아주 기본적인 틀에서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럼 코치님은 선수들 때리고 뭐 그러지는 않겠네요."아니에요. 가끔 때립니다. 한두 번 실수는 당연하지만, 계속하면 본인이 노력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때는 정신 차려야죠."- 어느 정도 대표팀이 안정되면 그만둔다고 하셨는데, 그때가 언젠가요?"남들이 봤을 때 대표팀 훈련하는 것 같다고 느낄 수 있을 때, 복지나 처우가 개선돼서 많은 사람들이 대표팀을 지도하고 싶다고 나설 수 있을 때. 유능한 지도자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른 팀을 맡으실 건가요?"지도자가 한 팀에 오래 있으면 썩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슬레지 하키팀을 맡고 싶어요. 혹시 아세요? 하반신 장애우들이 많이 하는데, 스케이트대신 썰매로 하키를 즐깁니다."- 이런 생각, 사모님은 아세요?"당연히 모르죠(웃음)."유난히 지기 싫어했던 소년은 이제 진짜 이겨야 할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은 좋은 지도자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선수들한테 꼭 얘기합니다. 포기하지 마라. 실패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포기하면 끝이다. 저 스스로도 많이 변했어요. 점점 자신감이 생기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수 때보다 더 열심히 운동합니다. 새벽에 쇳덩이를 들면서 다짐하죠. 열심히 살자."에필로그"아니에요. 가끔 때립니다..."다 큰 처녀들을, 아니 결혼한 주부도 있는데.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선수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낮에는 사장님, 밤에는 국가대표 선수인 황현정 씨(2001.12.22일자, 우리 사장님은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 제하 보도). 다들 그렇겠지만, 그녀만큼 속상할 사람도 없을 듯했다. 2일, 수화기 너머로 깔깔대는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하하하. 맞죠. 왜 안 맞아요? 내가 맞을 짓 했구나. 맞아도 정당하다고 느껴요. 각자 나쁜 버릇이 있어요. 저도 선생님도 고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10번 중 5번 되면 충분히 고칠 수 있는 거니까요. 다 절차가 있어요. 무조건 때리시지 않고, 우선 많은 기회를 주세요. 어떨 때는 '처음부터 때렸으면 잘 했을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도 할 때가 있어요. 마음이 너무 약하신 것 같아요."- 어떻게 맞아요? 별로 아프지 않겠죠? "아니에요. 엎드려 뻗쳐 하고 스틱으로 엉덩이 맞아요. 되게 아파요(웃음)." - 주로 어떨 때 나쁜 버릇이 나와요? "모두 운동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사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그래서 일단 링크 안에 들어오면 바깥의 일은 잊으라고 말씀하시죠. 근데 사실 그게 잘 안돼요. 처음에는 저도 스트레스 받아서 막 뛰기 싫고 그런 적이 많았어요. 그런데 스트레스에 계속 지면 그것도 버릇이 되더라구요. 이젠 많이 나아졌지만요." - 그날(3월 27일) 코치님은 왜 그렇게 화가 나신 거예요? "저희들이 거의 다듬어졌는데… 도로 내려갈 때가 있어요. 처음부터 안 되는 게 아니라… 나쁜 버릇들이 또 나오니까. 결국 정신 못 차린 건데요. 선수들도 기복이 있잖아요. 선생님은 기복을 최소화하고 평준화시키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라는 거죠."- 혹시 그날도 맞은 거 아니에요? "아뇨. 그 다음 경기에서는 칭찬까지 받았는데요? 가끔 이해 못할 때가 있어요. 어떤 날은 골을 많이 먹었는데도 칭찬 해주시거든요? 가만 보면 팀웍이 좋았다고 느껴질 때였던 것 같아요. 근데 사실 자기가 잘했다고 칭찬 받고 싶잖아요. 그럼 또 혼나죠. 왜 너 혼자 하려고 하느냐."
ⓒSP21 이혜준

덧붙이는 글 가슴 아픈 가족사를 '기사로 써도 좋다'고 흔쾌히 허락해주신 코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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