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야구부가 있다.

부모님의 은혜 10가지(父母恩重經)와 일기를 써서 검사 받아야 하고, 자신과 부모님의 이름을 영어와 한자로 적을 줄 아는지 시험도 봐야 한다. 똑바로 적지 못하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난다. 하지만 야구는 알아서 한다. 사인 없이 스스로들 시합을 치르고, 남들 다 가는 합숙도 가지 않는다. 번트를 잘 하는 것보다는 방망이를 맘껏 휘두를 줄 알아야 한다.

청구 초등학교 야구부 손용근 감독(43세). 2002년 5월 15일 스승의 날, 호랑이 감독님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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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55분,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청구 초등학교로 걸음을 재촉했다. 어젯밤 김병도 군의 어머니(최순이 씨. 40세)는 "연습 들어가기 전, 아이들이 감독님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릴 것 같다"고 말했다. 교문 사이로 운동장에 모여 있는 야구부 아이들이 보인다. 속으로 '아차'싶었다. 벌써 연습이 시작됐나보다.

손 감독이 보이지 않는다. 야구부실로 향하는데, 그 앞에서 젊은이 두 명이 뭔가 짐을 옮기고 있다. 가까이 다가서니 모두 건장한 체격,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음료수 박스가 들려 있다.

-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
"왜 그러시는데요?"

- 예. 저희는 감독님을 취재 나왔는데요.
"(옆 사람 어깨를 툭 치며) 야- 그 동안 감독님 많이 유명해지셨나봐!"

- 손 감독님 제자들이세요?
"예."

- 언제 졸업하셨어요?
"우리가 41회지? 몇 년도 졸업이야?", "15년 전이니까... 야, 모르겠다(웃음)."

함께 야구부실에 들어서자, 왼쪽 선반에 카네이션 바구니가 수북하다. 오른쪽에는 두 사람이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음료수와 간식 거리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이정주, 정상정 씨. 스물여덟살 동갑내기로 LG트윈스 신윤호 선수와는 동창이다.

- 얼마만에 오신 거죠?
"15년 만에 처음이에요. 그런데도 감독님은 딱 알아보시더라구요." (정)
"이 친구가 그때나 지금이나 덩치가 똑같거든요(웃음)." (이)

- 오랜만에 모교에 왔는데 어때요?
"감독님 젊었을 때는 강인하게만 보였는데, 나이가 드시면서 깊이가 생기신 것 같아요. 하지만 감독님 성품은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친구를 돌아보며) 인정이 많으시지 않아? 그러니까 어려운 사람들도 많이 도와주시고..." (정)
"이 친구가 감독님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이)

현재 청구 초등학교 옆에는 아파트가 번듯하게 서 있다. 하지만 15년 전만 해도 그 자리에는 판잣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정상정 씨는 달동네 아이들 중에서도 특히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한다.

"한번은 야유회를 갔는데, 돈이 없어서 빠지려고 했어요. 감독님이 막 혼내시더라구요. 오라고. 단체생활에서 빠지면 어떡하냐고. 갔다 왔죠. 그런데 그때 비가 많이 와서 젖은 쌀이 많았어요. 그걸 안 버리시구 햇볕만 나면 들고 나와서, 일일이 손으로 골라내고 말려서. 어느 날 부르시는 거예요. '야, 좋은 거 줘야 하는데'... 그러면서 애들한테 표 안 나게 주시더라구요. 그때 정말 눈물 많이 흘렸어요."(정)

하지만 정 씨는 야구와 학업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형님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소년에게 '야구'는 사치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너무 힘들다 보니까,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감독님이 저 막 찾으러 다니시고... 어떻게든 야구시키려고 하셨죠. 저에겐 아버님 같은 분이었는데. 한마디로 제가 배신 때린 거죠." (정)

15년 전에도 자신과 부모님의 이름을 영어와 한자로 적었는지, 일기를 써야 했는지 궁금했다. 만약 그랬다면, 스승의 가르침을 지금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실 귀찮았죠. 날씨 맑음, 흐림, 맑음, 흐림(웃음). 지금도 확실히 들 야(野)자, 공 구(球)자는 알아요." (이)
"솔직히 스포츠인들 공부 안하잖아요. 일자무식이다라는 말도 돌구요. 감독님은 기본적인 걸 모르면서 몇 십억씩 받는 프로 선수가 되는 거 원하지 않으세요. 아마 중고등학교 때까지는 뭐가 도움이 되는지 모를 거에요. 막상 사회에 나오니까 알겠더라구요." (정)
"인간 만들려고 노력 많이 하셨지. 감독님이." (이)

그래서 두 사람 모두 손 감독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던' 모양이다.

"솔직히 맞으면 열 받기도 했었죠. 그런데 당신도 때리면서 마음이 아픈 거에요. 엉덩이 까 가지고 약 발라주고. 한마디로 병주고 약주고죠(웃음). 지금은 이해해요. 다 애들 잘 되라구. 그게 사랑이었다는 걸 아는 제자들은 다 오게 돼요. 얼마전 친구 결혼식 때 얘기가 나왔어요. 감독님한테 가봐야 되지 않냐. 다른 친구들은 직장 생활 하니까, 오늘은 우리끼리만 온 거죠. 그 동안 많이 찾아 뵈야 하는데, 좀 자리를 잡은 다음에 오고 싶었어요." (정)

현재 이정주 씨는 공인중개사다. 정상정 씨는 IT 관련 업체에서 일한다. 그리고 4살짜리 아들을 둔 정 씨는 한 집안의 가장이기도 하다. 이제 성인으로 자란 제자들에게 손 감독은 어떤 말을 해줬을까.

"가족이 중요하다. 열심히 살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는요, 우리 아들이 원한다면 청구 야구부에 들게 하고 싶어요. (옆에서 웃자) 야! 진짜야! 우리 감독님 능력 좋으셨어요. 고등학교에서 감독으로 오라고 그랬는데,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지. 아무래도 초등학교 감독 월급이 적잖아요. 나 같으면 고등학교 가버려. (친구를 쳐다보며) 야, 그런데 감독님 막노동꾼 같지 않냐?" (정)

-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야구부실) 원래 화장실이었어요. 청구 초등학교 야구부에 감독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거든요? 옛날에 우리랑 흙 퍼다가 같이 지은 건물이에요. 우리가 만든 자리죠. 이 자리가. (정)

- 특별히 감독님께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우리 감독님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좋은 제자들 많이 길러 내시고..." (이)
"담배 좀 줄이셨으면 좋겠어요. 걱정이에요. 얼굴이 노랗게 변할 정도로 담배를 많이 피시니까..." (정)

"고맙다. 그래 가봐라. 열심히 하고, 응?"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다음에는 더 많은 친구들과 함께 고기를 구어 먹으며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정상정 씨. 아쉬운 듯 허리를 깊게 숙인다. 손을 흔들어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제자들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눈빛으로 배웅하는 스승.

- 감독님, 담배 줄이셔야겠어요. 제자들이 걱정 많이 하던데.
"줄여야 되는데... 모르겠어요. 쉽게 안 되는데..."

- 정상정 씨가 많이 어려웠나봐요?
"어려웠어요. 그놈이. 부모가 다 없어 가지고, 학교를 못 다녔어요.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야구 그만두고, 공장 다니고 그런 모양이더라구. 검정고시하고 지가 혼자 공부한 모양이에요. 잘 됐지. 뭐."

- 이제는 자식을 둔 가장으로 왔잖아요. 흐뭇하시겠어요.
"아유 참 빠른 것 같애. 쟤들 보면 빠른 것 같애. 밝게 사니까 참 좋네요. 야구는 세상살이에 일부분 밖에 안되잖아요. 제가 가졌던 부담도 덜어지는 것 같고. 야구로 성공한 애들이 와도 기쁘지만, 야구를 벗어나서도 잘 사는 애들 보면 더 보기 좋습니다. 더 기뻐요."

[동영상 보기] 청구초등학교 야구부의 스승의 날 - 이혜준 기자


"감독님, 차 좀 바꾸셨으면 좋겠어요"


15년만에 찾아 온 두 사람과 인터뷰 하는 동안, 제자들의 방문은 계속됐다.

일단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중학생들이 가장 많았다. 스승의 날을 맞아 일찍 수업을 끝내고 나타난 앳된 선배 8명. 이젠 다른 유니폼을 입고, 또는 교복을 입은 채로 후배들과 함께 야구 시합을 벌였다. 운동장에서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인지 모두 즐거운 얼굴들. 저녁이 되면서 빗줄기가 굵어졌는데도, 선후배간의 '스승의 날 기념 야구 시합(?)'은 끝나지 않았다.

고등학생 두 명도 만날 수 있었다. 휘문고등학교 1학년 이동호(17세), 덕수정보산업고등학교 1학년 서명식 선수(17세)는 약 1시간 간격으로 각각 손 감독을 만나고 돌아갔다. 특히 명식 군은 재미있게 얘기를 나누면서, 한편으로는 손 감독에 대한 속깊은 마음을 드러냈다.

- 언제 감독님을 뵙고 싶어요?
"고민거리가 있을 때. 야구 안되거나 진학 문제 그런 거..."

- 아까 동호는 많이 맞았다고 하던데..
"걔는 많이 맞았죠(웃음). 저희 때는 잘 했거든요?"

- 청구 타격 연습이 좀 특별하잖아요? 오른쪽, 왼쪽 모두 휘두르는 연습을 하던데.
"원래 저도 오른손이었는데 왼손으로 바꿔 치게 됐어요. 우투좌타죠. 아무래도 오른손보다 왼손이 유리하니까. 여기 나왔다고 하면, '좋은데 나왔다'는 말 많이 들었어요. 어디 가서도 떨어지지 않으니까. 중학교에서도 그랬고, 고등학교에서도."

- 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는 건?
"여기(청구)는 폼 같은 거 크게 신경 안 쓰고 치고 싶은대로 치거든요? 그래서 주위에서 청구 나온 애들은 무조건 오면 자기 스윙대로 자신 있게 친다구 그래요. (감독님이) 검소하시구, 청구 감독님만한 감독님 없다고 그러죠."

- 언제 검소하시다고 느꼈어요?
"초등학교때부터 그랬어요. 지나가다 쓸모 있는 거 있으며 주워서 쓰시고. 차도 굉장히 오래 됐어요."

- 감독님께서 일기 많이 쓰게 했잖아요?
"(도리질, 웃으며)일기 숙제 죽었죠. 안할 때마다 맞았죠(웃음). 부모님 성함 한문 쓰고 일기 맨날 쓰고 그랬어요."

- 부모은중경 중에 기억나는 구절 있어요?
"첫째가 아이를 배서 지키고 보호하여 주신 은혜. 둘째가 해산함에 임하여 고통을 받으신 은혜. 셋째가 뭐였지. 하튼 막 헷갈려서...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신..."

- 감독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그냥 차 좀 바꾸셨으면 좋겠어요(웃음). 10년도 더 된 것 같은데요."

- 차를 왜 바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아까 딱 봤는데요. 문도 막 잘 안 닫히고 딱 문을 닫는데 한번 튕겼다 열리더라구요. 그리고 감독님 걱정하시지 않게, 야구부원들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스포츠피플21(www.sportspeople21.com)에도 실려 있습니다.

2002-05-16 13:14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스포츠피플21(www.sportspeople21.com)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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