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 축구전문 캐스터 ⓒ 이원영
지난 21일 독일 대 미국의 8강전. 이날 독일 대표 선수들은 모두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경기에 출전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독일 월드컵 첫 우승 주역이었던 프릿치 발터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이 전세계로 송출됐다.

MBC 최창섭 캐스터는 "우리나라의 누구와 견줄 수 있는 인물이냐"고 물었고, 차범근 해설위원은 "우리 김용식 선생님"이라고 대답했다.

유난히 쓸쓸해 보였던 김용식 선생의 묘소. 그리고 고인에게 가는 길을 알려 주려고 애쓰던 서기원 캐스터(65)가 떠올랐다. 요즘 모 이동통신업체의 CF에서 핸드폰을 손에 든 배용준씨의 얼굴 뒤로 흐르는 목소리의 주인공. 올림픽,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 30년 넘게 스포츠 현장의 소리를 담아낸 그는 현재 모 케이블TV에서 방송을 하고 있다.

"히딩크? 명장이지. 선진 축구를 안다는 게 얼마나 큰 거야. 대접을 받을 만한 인물이야. 그런데 너무 띄우기만 한단 말야. 훌륭한 재료들이 있었으니까 히딩크도 좋은 팀을 만들 수 있었던 거 아냐. 선수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잖아. 우리 축구 역사가 100년이 되는데, 일제 탄압때나 그 배고프고 가난하고 위험한 6.25때도 축구를 계속했다고. 그래서 우리가 바탕을 만들어놨던 것 아냐.

히딩크를 무시한다거나 폄하한다는 뜻이 아냐.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과거 우리 축구에 관심을 가져줘야 된다는 거지. 우리 원로 축구인들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거야. 그분들이 없었다면 우리 축구 이렇게 발전 못해요. 이럴 때일수록 돌아보는 여유를 가져야 하는데. 보라구. 이제 몇 년 후 우리 축구가 더 발전하면 히딩크는 또 잊어버린다구. 그래서는 안되지."

자리에 앉자마자, 서기원 캐스터는 담배 연기와 함께 답답한 마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히딩크 감독의 동상을 세우겠다, 명예시민증을 수여하겠다, 히딩크 동산을 만들겠다고 앞다투어 발표하는 요즘. 그는 더욱 답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김용식 선생의 평전을 직접 쓸 정도로 축구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서 캐스터. 그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자료를 뒤진 끝에, 작년 11월에야 '어떤 인생(김용식 선생 평전 제목)'을 되살려낼 수 있었다.

ⓒ이원영
- 많은 축구인 중 김용식 선생을 주목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나도 김용식 선생을 늦게 알았어. 그전까지는 '우리 축구의 대부'정도로만 알았지. 그런데 자료 수집을 하다 보니까, 이분이 축구 정신에 너무 철저했던 거야. 요즘 우리 축구가 막말로 이기는 데만 너무 치중해서 기본이 허약하잖아. 그리고 축구를 제대로 이해할 줄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어린 선수들이 본받을 만한 영웅이라는 생각이 들었지."

- 축구 정신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아주 간단한 거예요. 규칙을 지키고, 심판 명령에 따르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 이것은 사회에서도 반드시 기본적으로 필요한 덕목들이라구. 규칙을 지킨다는 건 우리가 사회에서 법을 지킨다는 것과 똑같은 거야. 심판 명령에 따른다는 거는 아- 지금 교통 법규를 위반한 것도 잘못인데 교통순경한테 멱살 잡고 따진다는 건 문제가 되는 거 아냐. 좋은 일이 아니라구.

그리고 축구에서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게 언제 두드러지냐 하면, 상대방 선수 하나가 넘어지잖아? 그럼 공을 바깥으로 내차준다구. 그래서 치료받도록 해주잖아. 그러면 상대방이 다시 공을 넘겨준다구. 생각해봐. 공격권 하나 뺏기 위해서 부상시키고 퇴장당하는 게 축구야. 이건 축구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야. 우리가 뭐 양보를 해라 질서를 지키자는 게 바로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거 아냐. 최선을 다한다는 건 뭐 늘상 얘기되는 거구. 축구의 기본 정신이 바로 우리 생활에 필요한 정신이라구. 그래서 어린이 축구부터 제대로 가르치자는 거야. 축구가 건전하게 발전하면 우리 사회도 따라서 건전하게 발전하게 돼. 그게 내가 축구에 거는 기대야."

▲1948년 7월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런던으로 가는 도중 일본 요코하마에서(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용식, 모자를 눌러 쓴 이가 고 유한철 씨) ⓒ 도서출판 명상 <어떤 인생> 삽입 사진

- 김용식 선생과 축구 정신은 어떤 관련이 있었는가.
"처음에는 김용식 선생도 무조건 이겨야 된다고 생각을 했어. 경신중학교 다닐 때는 다른 선수들이 '아유- 내일 김용식이 나온대'하면서 밤잠을 못잤다는 거야. 얼마나 거칠게 플레이를 하고 아주 그냥 까기의 명수였는지 걸렸다 하면 당하는 거에요. 그런 분이었는데 중국에 조선축구단 멤버로 원정을 갔다가 영국 사람이 쓴 스포츠 정신에 대한 해설을 본 거야. 지금 얘기한 바로 그런 거. 그 다음부터 그라운드의 신사로 돌변했다는 거야. 지도자 생활을 할 때는 스포츠 정신을 선수들한테 무조건 외우게 했어. 그래서 그때 제자들, 이제는 60이 다된 제자들이 아직까지 줄줄 외우더라구."

- 김용식 선생이 우리 축구에 미친 영향은?
"1930년대만해도 뻥 축구였다구. 김용식 선생은 기술 축구를 뿌리 내리게 한 사람이야. 그리고 지도자로서는 축구에 전술을 처음으로 도입한 분이야. 외국책을 보면서 자기 나름대로 개발한 전술이 60여 가지가 됐다는 거야. 축구 외교에도 개척자야. 우리 대표로 피파총회에 네 번이나 가서 연설도 하고 그런 사람이야. 우리 축구 역사를 쓴다고 했을 때, 프로 축구가 탄생하기까지 김용식 선생이 등장 안하는 곳이 거의 없어. 오늘날 우리 축구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지."

- 다른 나라의 축구 영웅과 견준다면.
"글쎄. 펠레나 에우제비오처럼 화려한 업적은 없어. 하지만 김용식 선생만큼 축구와 평생을 함께 한 분은 아직 내가 못 봤어. 이렇게 열정적으로 한 분이 없어요. 60세가 넘어서까지 몸 관리 해서 기술 녹슬지 않게 볼 리프팅을 한다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42살까지 현역에서 뛰었어요. 요즘도 그런 선수 없잖아."

ⓒ 이원영
- 오랫 동안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몸에 나쁘다는 건 일절 하지 않았어. 아주 몸 관리를 위해서 청교도적인 삶을 산 사람이야. 그리고 몸에 좋다면 정말 우스을 정도로 못난 짓도 했지. 동료 선수가 놀려 주려고 톱밥을 꿀에 개서 먹으면 몸에 좋다고 하니까 진짜로 그렇게 해먹기도 했다구. 한 번은 제자가 담배 피는 걸 걸린 거야. 혼나니까 담배를 입에 넣고 질겅 질겅 씹었어. '뭘 먹냐'하니까 '담배 꽁초 먹습니다', '근데 꽁초를 왜 먹어?', '몸에 좋아서 먹습니다'. 그 다음날 바로 담배 꽁초를 씹었다는 것 아냐(웃음)."

- 이런 일화들은 어떻게 알게 됐나.
"옛날 잡지에 나온 인터뷰 기사들을 스크랩하고, 누가 자료가 있다고 하면 가서 얻어 왔지. 그리고 몇 년에 뭐하고 몇 년에 뭐하고 그렇게 표를 만들어 자료를 정리했지. 이걸 토대로 사람들을 만나 물어봤어. 돌아가신 함흥철 선생이라든지, 원로 축구인들 만나 '김용식 선생이 어떤 분이었나', '에피소드는 없나' 나 나름대로 취재를 했지."

- 혹시 축구인 중에 김용식 선생을 모르는 사람이 있었는가.
"40대 이전의 축구인들중에는 꽤 있더라구. 현역 축구 선수 중에도 더러 있구. 안타깝더라구. 그래서 사실은 지금 살아 계신 분들의 기록도 남겨야 된다구. 이런 작업이 대를 이어서 해나가야지. 하루 아침에 축구가 되는 게 아니잖아."

- 김용식 선생이 잊혀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당장 이기는 축구만 생각하기 때문에. 과거는 빨리 잊잖아. 김용식 선생만 잊는 게 아냐. 최정민 아는 사람 별로 없어. 최정민은 김용식 선생이 발탁해서 키워낸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다구. 지금 우리나라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당장 이기는 것만 좋아했지, 과정은 볼 줄 모른다구. 지금의 지도자들도 그렇게 배워 왔고, 그래서 아이들한테도 축구를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는 거야."

- 축구를 제대로 가르친다는 의미는?
"축구를 재미로 시작해야 된다구. 이기는 축구해서는 안된다구. 그냥 축구가 좋아서 즐거워야 된다구. 그러면서 기초를 확실히 다져줘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초등학교부터 이기는 축구만 했지, 기초 기술은 소홀히 했다구. 거기다가 축구 정신은 외면했지. '야, 심판이 안 볼 때는 까도 좋아. 상대편 어떤 놈이 잘한대, 그럼 걔 조져' 그러는 경우가 많다구. 축구 정신에 위배되는 거 아냐. '옛날에 우리 축구 이런 분이 있었는데 이랬다'고 가르쳐야 된단 말야."

- 언론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한데.
"일본 요미우리 TV에서 취재를 해갔어. 우리 축구를 취재하면서 걔들은 김용식 선생을 안 거야. 어쨌든 관심을 가져주니까 나도 고마워서 산소까지 안내하려고 했었지. 아주 준비를 많이 했더라구. 베를린 올림픽 당시 김용식 선생과 같이 뛰었던 사람들도 다 만나고 왔더라구. 그런데 우리는 와- 히딩크 띄우면서도 우리 과거나 원로 축구인들 기사 한 줄 안 나와.

내가 1980년대초든가 포르투갈에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 때문에 갔다가 놀랬다구. 벤피카 구장 앞에 에우제비오 동상이 서 있는 거야. 그런데 우리는 축구인에 대한 동상이 하나도 없어. 이번에 상암이라든지 축구 회관에 선생 동상이라도 딱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세계인들에게도 알려졌을 것 아냐. 단 한 구장 앞에라도 세워져 있었으면 참 좋을 뻔 했는데... 안타까워."


"김용식 선생의 인생"


▲ 지난 2월 김용식 선생 묘소를 방문했다. 서기원 캐스터는 "묘소 위치를 알아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현재 유족의 행방도 묘연한 상태다. ⓒ이정환
1910년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한 김용식 선생은 일제시대와 해방 초기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는 가슴에 일장기를 단 유일한 조선 선수로, 1948년 런던 올림픽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축구 국가 대표 선수로 출전했다.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선수를 모아 축구의 맥을 이었고, 42세에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1954년 국가 대표팀 코치로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한 것을 비롯해 주요 국제대회 때마다 대표팀을 이끌었다. 군 팀과 금성 방직, 양지, 신탁 은행 등의 감독 등을 역임했고,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 축구팀인 할렐루야를 창단해 프로팀 제1호 감독이 되기도 했다. 그 동안 축구 지도서를 출간해 축구 선수 양성의 기틀을 마련했고, FIFA총회에 한국 수석 대표로 참석해 연설하는 등 축구 외교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도 큰 공헌을 했다.

또한 1936년 11월 15일부터 1만일을 목표로 스킬 플레이(볼 리프팅 : 발, 어깨, 이마 등으로 공을 튕기는 일을 계속하는 것)연습을 시작해서, 42년 2개월만인 1979년 1월 15일에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특히 고령에도 불구하고 미국, 일본 등에서 스킬 플레이 시범을 보이며 한국 축구를 널리 알렸다.

1985년 3월 8일, 향년 75세로 운명한 김용식 선생은 경기도 포천군 서능 공원 묘지에 묻혀 있다. 현재 김용식 선생의 묘소 앞에는 고려대학교, 대한 축구 협회 등이 고인의 1주기를 맞아 합동으로 세운 조그만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다음은 기념비 전문이다.

"한 사람이 한 평생 외곬으로 살면 얼마만큼 기량을 닦을 수 있는가를
한 사람의 정성과 집념과 헌신이 얼마만큼 업적을 쌓을 수 있는가를
한 사람이 진실로 최선을 다한다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를
당신은 몸소 뚜렷이 보여 주었습니다.

자나 깨나 축구 밖에 몰랐던 70평생 선수로, 코치로, 시범가로, 지도자로
국내외에서 투지와 명성을 떨치며
한국 축구를 세계 무대로 발돋움하게 한 바로 그 사람, 불후의 이름 김용식!

축구공과 피를 통하고 신경을 나누어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만든 불굴의 의지,
끊임없는 수련으로 스스로의 도를 완성한 만인의 스승
우리의 위대한 선배 김용식 선생

덧붙이는 글 | 두번째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2002-06-27 19:30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두번째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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