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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어리석음으로 사달이 났다. 무엇에 홀린 듯 한여름 나홀로 산행에 나섰다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낭패를 당했다. 이 글은 위험한 산행으로 주변을 혼란케 했던 필자의 참회록이다. 등산로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무모하게 도전하여 119 산악 구조대 신세를 지고 말았던 어리석음을 후회한다. 그 누구라도 필자 같은 산행을 절대로 하면 안 된다. 읽는 분들의 채찍은 달게 받으련다. [기자말]
백석산 주변 임도에서 바라본 정경. 해발 1200 고지가 넘는다.
 백석산 주변 임도에서 바라본 정경. 해발 1200 고지가 넘는다.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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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산골 뒤편에는 해발 1365미터에 이르는 '백석산'이 있다. 집 주변 임도를 따라 풍광 좋은 곳에서 에너지를 충전하고 싶었다. 해발 1200미터 정도 오르면 운무와 겹겹 능선이 조화를 이뤄 멋진 사진도 얻으리라 믿었다. 마침 새벽안개가 잔뜩 낀 데다 고산 지대라서 무더위는 이겨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여름 야생화도 반겨주리라 기대하면서 8월 첫날 6시 30분에 250㎖ 생수 두 병을 챙겨 카메라를 메고 등산화를 신었다.

한여름에 정상까지 가는 건 무모하다고 믿었다. 더구나 내가 사는 산골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를 정확히 모르는 터라 섣불리 도전했다가 낭패를 당할 수 있다는 건 상식이었다. 한여름엔 고산 지대 산행을 택하는 게 무더위를 피하는 한 방법이라던 등반 전문가의 말을 떠올렸다. 오르내리기 좋은 임도를 따라 왕복 4시간 정도 산행을 예정했다. 해발 700미터, 산골 누옥에서 임도 초입으로 향했다.

임도 주변까지 안개가 자욱했고 가끔씩 바람까지 불었다. 나홀로 산행은 호젓했다. 길가 양쪽에는 큰세잎쥐손이, 동자꽃, 도라지모시대, 만삼, 참취, 잔대, 구릿대, 으아리, 파리풀, 싸리, 물봉선, 산박하, 영아자, 마타리, 노루오줌, 등골나물 등 여름 야생화들이 열렬하게 나를 반겼다.
  
야생화 '잔대'
 야생화 '잔대'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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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마타리. 노란별의 조합이 아름답다.
 야생화, 마타리. 노란별의 조합이 아름답다.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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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월 말에 퇴직하여 평소 관심 분야였던 야생화에 흠뻑 빠졌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해발 700미터 산골은 한겨울을 빼고 온갖 야생화가 자태를 뽐내는 곳으로 야생화 초보인 내게 즐거운 감탄사를 연발케 한다. 이번 산행 중에도 즐겁고 설레는 마음으로 카메라에 야생화를 담았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해발 1200미터 정도에 다다랐을 때 동자꽃이 단란한 가족처럼 피어 있어 기분 좋게 사진을 찍었다. 그 곁에 참취꽃을 바라보는 찰나 으아악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을 쳤다.
 
볼수록 정겨운, 색감 좋은 야생화, 동자꽃
 볼수록 정겨운, 색감 좋은 야생화, 동자꽃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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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촬영 중 만난 뱀(유혈목이)
 야생화 촬영 중 만난 뱀(유혈목이)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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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 한 마리가 이파리 무성한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나를 쏘아보았다. 순간 등산용 스틱을 움켜쥐었다. 정확하게 한 방만 내리친다면 내게 승산이 있었다. 그런 악성이 발동하려는 순간 뇌의 한 켠에서 선성이 타일렀다.

설마 저 뱀이 나뭇가지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나를 공격할까. 그래, 우선 침착하자. 그리고 꽃을 탐하는 꽃쟁이들에게 야생화 촬영 중 뱀 조심을 강조하자. 우선 나부터 조심조심, 천천히 다가가 뱀눈에 카메라 초점을 맞췄다. 섬뜩했다. 뱀은 나무늘보나 달팽이가 당황할 만큼 거의 정지 동작이었다.

스틱을 다시 움켜쥐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 해코지도 안 하는데 굳이 죽여야 하나, 이 깊은 산속에 오직 나밖에 없는데, 휴대폰도 안 터지는 곳인데, 잘못했다간 내가 죽을 수도 있어. 그래, 너도 가고 나도 가자. 잘 있어라.'

몇 차례 뒤를 돌아보며 뱀과 헤어졌다. 동자꽃, 큰세잎쥐손이, 도라지모시대가 임도 여기저기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 색감과 모양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었다. 나도 모르게 상당 거리를 걸었다. 지난겨울 눈길을 밟으며 왔던 곳을 훨씬 지나쳤다. 사실 거기까지가 목적지였는데, 무엇에 홀렸는지 한여름 임도를 하염없이 걸었다.

왜 전진하는 결단을 내렸을까
  
성처 입은 야생화, '큰세잎쥐손이'. 마치 내 신세와 닮아 보였다.
 성처 입은 야생화, '큰세잎쥐손이'. 마치 내 신세와 닮아 보였다.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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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의 고산 지대라선지 갈증은 덜했다. 생수 두 병 중 한 병을 비웠다. 슬슬 배가 고팠지만, 그 어떤 간식도 없었다. 마침 뱃살도 나오는데 간헐적 단식을 한다고 위안 삼았다.

올라오는 동안 고라니 세 마리를 보았다. 해발 1200미터가 넘는 고지대였다. 되돌아가는 게 상책이었지만 임도의 끝을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상당 거리를 지나자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그 어떤 표지판도 없었다. 오른쪽이냐, 왼쪽이냐를 고민했다. 이 갈림길에서 나는 왜 되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나는 왜 전진하는 결단을 내렸을까. 마치 루비콘강이라도 건넌 듯 되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을 오고 말았다.

오른쪽은 평창군 대화면으로 가는 길일 테고, 왼쪽은 내가 사는 마을 위쪽인 막동리가 나올 거라고 믿었다. 왼쪽 길을 선택한 내게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시련이 닥쳐왔다.
 
가도가도 끝이 나오지 않는 임도.
 가도가도 끝이 나오지 않는 임도.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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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가도 끝이 없다는 말을 실감하며 걸었다. 희한하게도 임도는 내리막길이 아니라 조금씩 올라가는 길이었다. 오르려면 내려가야 하고, 내려가려면 올라가는 게 산이다. 내려가기 위해 올라가는 거라고 믿으며 걷고 또 걸었다.

6시 30분에 출발하여 4시간 산행을 예정했으므로 10시 30분이면 집에 도착해야 했다. 그런 내게 휴대폰이 알려주는 시간은 오후 1시를 넘기고 있었다.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시간은 충분했다. 임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하산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250㎖ 생수 두 병 중 한 병은 이미 비웠고, 남은 한 병은 반쯤 남아 있었다. 남은 물을 아끼고 또 아끼며 그늘에서 쉬기도 하며 임도 끝을 향해 '제발 내리막길아 나와라' 주문을 외며 걸었다. 휴대폰 상단에는 통화 불가 표시가 지속되었다. 그 누구와도 통화가 불가능했다.

아주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였다. 임도에서 이탈하여 계곡으로 향했다. 시원한 물로 머리를 감고 상체에 물을 뿌렸다. 옷을 벗어 예쁜 폭포수에 적셨다. 더위는커녕 추위가 느껴졌다. 여유 있게 빈 생수병에 물을 담았다. 시간이 지났을 때 이 물은 나의 생명수가 되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고 전진을 택한 것이 1차 잘못이었다면 계곡을 타고 하산하기로 한 건 2차 잘못이었다. 해발이 낮은 산에서라면 가능한 방법일지 몰라도 해발 1200미터에서 계곡을 타고 하산한다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 미친 짓을 1시간 넘게 진행했다.

왜 객기를 부렸던가
  
동자꽃을 좋아하는 산제비나비 만큼이나 나도 동자꽃을 좋아한다.
 동자꽃을 좋아하는 산제비나비 만큼이나 나도 동자꽃을 좋아한다.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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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은 물이 흐르는 곳이지 사람이 다니는 길은 결코 아니었다. 계곡의 돌덩이는 흔들거렸고 한 발만 헛디디거나 이끼에 미끄러진다면 심각한 부상을 당할 지경이었다. 계곡 주변에 빽빽하게 자란 나무와 덤불을 뚫으며 이건 아니다 싶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더구나 휴대폰까지 불통이니 깊은 산골에서 사고라도 난다면 목숨마저 위태롭다는 판단에 계곡 하산을 중단키로 했다.

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길은 더욱 험난했다. 가파른 오르막인 데다 잡목숲을 뚫기가 더욱 힘들었다. 체력 손실이 엄청났다. 6시 30분에 집을 나서 깊은 계곡에서 본 시간은 오후 2시 30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임도를 만나 걷기 시작했을 때 안 터지던 휴대폰이 울렸다.

아내였다. 119에 조난 신고했으니 그 자리에 있으라는 거였다.

"뭐라고? 무슨 119야! 아직 시간도 많고 어디 다친 데도 없으니까 당장 취소해! 임도 따라 걸으면 끝이 나올 테니 염려 말어!"

계곡에서 올라와 임도를 다시 만났겠다, 걷고 걸으면 끝이 나올 거라는 믿음은 강렬했다. 그래도 TV 등산 관련 프로그램에 두 차례나 출연하여 등반 모습을 뽐내지 않았던가! 내 어찌 119에 의존한단 말인가! 자존감을 세워 하염없이 걸었다.

더웠다. 발바닥 어딘가에도 물집이 생겨 괴롭혔다. 체력이 떨어진 게 분명했다. 계곡에서 채운 물 두 병은 바닥났다. 이 물이 아니었다면 탈진 가능성이 농후했다. 지나고 보니 생명수였다. 배에서는 밥을 달라고 졸랐다. 여전히 휴대폰은 불통이었다. 119는 돌아갔겠지? 명색이 산 좀 타는 내게 119 구조 대원의 신세를 지라고?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 깊은 산속에서 제대로 길도 모른 채 도대체 왜 객기를 부렸던가!
  
헤매고 있는 내게 웃음 짓는 야생화, '물봉선'
 헤매고 있는 내게 웃음 짓는 야생화, '물봉선'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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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자책을 거듭하는 순간, 이건 또 뭔가! 1차적으로 잘못 탔던 임도와 다시 만나고 있었다. 이전 두 갈래 길에서 왼쪽 임도를 선택해 걸었는데 산을 한 바퀴 돌고 돌아 이전 임도로 되돌아와 만난 것이다. 허탈 그 자체였다. 올라왔던 길을 다시 만났으니 잃어버린 길은 찾은 셈이었다.

남은 거리는 5킬로미터 정도였다. 완만한 내리막 임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119 구조대원입니다. 지금 어디 계신가요? 몸 상태는 어떠십니까?"

"아, 예에... 우선 죄송합니다. 제 실수로 무리를 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됐습니다. 길을 잘 찾았고 몸에도 문제없어요. 3~4킬로미터 정도 남은 듯해요. 천천히 내려갈 테니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저희 구조대 차량이 이미 임도를 따라 진입했으니 계시는 곳까지 가겠습니다. 안전한 곳에서 기다려 주세요."


고마운 마음이 더 깊었다

산이 좋아 산에서 사는 내가 휴대폰도 제대로 안 터지는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 119 산악 구조대 차에 실려 내려간다고? 구조대원과 소통을 마치는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영화에나 나오는, 사막으로 쫓겨난 악당이 겪는 듯한 갈증이 찾아왔다.

10분 남짓 기다렸을까? 임도를 타고 올라오는 차량의 엔진음이 점점 크게 들렸다. 팀장으로 보이는 119 산악 구조대원은 내 체력과 부상 여부를 물었다. '네, 괜찮아요'보다 '미안해요'가 먼저 나왔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미안했다.

"임도를 잘못 타면 하염없이 걷게 돼요. 한여름에 탈진하면 큰일 날 수도 있어요."

구조팀장의 위로에 미안한 마음이 깊어졌다. 구조대원이 건네는 생수 한 병을 벌컥벌컥 마셨다. 사막은 오아시스로 변했다. 구조대가 아니었더라면 갈증 속에서 3~4Km를 더 걸어야 했을 텐데, 혹시라도 탈진 사고가 날 수도 있었을 텐데, 고마운 마음이 더 깊었다.

8월 첫날을 기념하여 기분 좋게 마음 다잡으려던 시도는 내 주변을 아주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아내의 침묵과 두 딸의 카톡은 매발톱보다 매서웠다. 직장에서 아빠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던 아들은 '헬기보다 차 타고 와서 다행'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운동량을 표시하는 앱에 숫자가 떴다. 3만 6134 걸음, 24.36Km. 6시 30분에 나서 10시 30분에 귀가하려던 계획은 오후 4시 30분 귀가로 변경됐다. 250㎖ 생수 두 병만 챙겨 임도와 계곡을 넘나들며 무려 10시간 동안 8월의 첫날을 먹칠했다.

무사 귀환 후 밥을 먹는데, 나뭇가지에 앉아 나를 노려보던 뱀(유혈목이)이 떠올랐다. 스틱으로 내려치지 않아서, 살생하지 않아서 이를 기특하게 여긴 산신령의 도움으로 무사히 내려와 밥을 먹는다고 믿었다. 구조대에게 너무 미안했다. 닷새 후 찐 옥수수 스무 개를 들고 구조대를 찾았다. 사무실에 들어가기가 하도 부끄러워 주변 소방관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도망치듯 나왔다.

어리석음으로, 무모한 객기로, 생각 능력 부족으로, 고산 지대 임도에서 길을 헤맸다. 강조컨대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참회록이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고, 절대 해서도 안 될 짓이었다. 우리 중에 그 누구에게도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리라.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이해를 구한다.

태그:#백석산 임도, #유혈목이, #임도 이탈, #119 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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