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 조선의 남아여!

그대들의 첩보(捷報)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2천 2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 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 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다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 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백림(伯林, 베를린)마라톤에 우승한 손(孫), 남(南) 양 군에게
1936년 8월 10일 심훈


2001년, 베를린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남승룡 타계

작년 11월 15일 손기정옹이 숨을 거둠으로써 '1936년 조선의 남아' 두 사람은 이제 모두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2001년 오늘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동메달을 딴 남승룡옹이 89세를 일기로 타계한 날이다.

▲ 베를린올림픽에서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
ⓒ Scmarathon
육상의 명문 양정고보 동문(남 옹이 1년 선배)이었던 두 사람의 마라톤 실력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다. 베를린 올림픽에 손 옹과 남옹이 함께 출전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1936년 최종 예선전에서 남옹은 1위, 손옹이 2위 그리고 3, 4위는 스즈끼와 시아끼가 각각 차지한다. 출전 엔트리 3명중에 일본인 2명을 포함시키고 싶었던 일본은 개막 3일전 베를린 현지에서 재선발전까지 치른다. 결과는 손기정 1위, 남승룡 2위.

1936년 8월 9일, 두 사람은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리고 있던'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준 영웅으로 우뚝 선다. 그러나 한 장의 사진, 시상대 위에서 월계관을 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손옹의 옆에 서 있던 사람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금메달과 동메달의 차이는 곧 남승룡의 존재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왕성한 대외 활동을 했던 손옹과는 달리 남옹은 전남대 교수와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1947.1 - 1963.9)를 끝으로 돌연 체육계와 인연을 끊고 야인으로 살아갔다.

그러나 고인의 마라톤에 대한 애정은 '남승룡'이란 이름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 놓고 있다. 특히 남옹은 1947년 서른 다섯의 나이에 보스턴 마라톤에 출전해 10위를 기록, 육상 후배들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현재 남옹의 고향 전남 순천에서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2001년부터 '순천남승룡마라톤대회'를 열고 있다.

1971년, 태릉국제스케이트장 개장

1971년 국무총리 등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태릉국제스케이트장 개장식이 열렸다. 당시로서는 거액이 투자된 공사였다. 총 공사비 2억 8500만원. 1971년 2월 20일 개장식은 1억9700만원의 예산이 투입된 스피드 링크 공사가 완료된 후 거행됐다.

세월의 변화에 따라 현재는 태릉옥외빙상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의 태릉국제스케이트장은 1997년 1월 착공해서 2000년 1월 31일에 준공됐으며, 국내 유일의 400미터 실내링크를 갖고 있다.
2003-02-20 12:01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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