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올림픽 출전 44년만의 첫 금메달. 세계를 놀라게 한 스케이트 날 들이밀기. 그리고 빼앗긴 금메달. 한국 쇼트트랙의 영광과 좌절의 역사가 오늘 쓰여졌다.

쇼트트랙이 공식 종목으로 처음 채택된 1992년 알베르빌 올림픽. 2월 21일 새벽 1000미터 결승이 열린 올림픽 아이스홀의 응원 열기는 뜨거웠다. 출발선에 나란히 선 이준호 맥밀런(뉴질랜드) 김기훈 블랙번(캐나다). 스타트 총성과 함께 맨 앞에 나서는 맥밀런, 다시 추월하는 블랙번.

3바퀴째, 맨 뒤에서 앞으로 치고 나갈 기회를 엿보던 김기훈이 총알처럼 선두로 파고든다. 월등한 레이스 진행. 2바퀴를 남겨 놓고 블랙번이 노란 헬멧 아래로 긴 머리를 휘날리며 김기훈에게 바짝 접근한다. 그러나 김기훈은 막판 스퍼트로 블랙번과 2-3미터의 거리를 두고 여유 있게 골인. 1분 30초 76, 세계신기록. 금메달 김기훈, 동메달 이준호. 블랙번은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환호하는 김기훈에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고 승자의 팔을 치켜준다.

▲ 중앙일보 2월 22일자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여자 1000미터 결승은 짜릿한 막판 뒤집기였다. 릴레함메르 올림픽 우승자이자 세계기록을 갖고 있었던 전이경의 정상 등극은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중국의 양양(A)이 준준결승에서 세계기록을 경신하고, 준결승에서도 전이경을 제치고 1위로 결승에 진출하면서 금메달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 2월 21일, 결승전. 양양(A) 양양(S) 원혜경, 꼴찌를 달리고 있던 전이경은 2바퀴를 남겨 놓고 원혜경과 양양(S)를 순식간에 따돌린다. 하지만 양양(A)는 만만치 않았다. 막상막하. 반바퀴만 남았는데도 여전히 맨 앞에서 질주하는 양양(A). 전이경은 마지막 코너에서 특유의 오른발 비틀며 회전하는 기술로 추월을 시도하지만 순위는 바뀌지 않는다.

눈앞에 펼쳐진 직선주로 그리고 피니시라인. 양양(A)가 안심하는 듯한 순간, 전이경이 속도를 내며 안쪽으로 파고든다. 당황한 양양(A)가 전이경을 왼손으로 가로막는다. 하지만 '승부사'는 왼쪽 무릎을 꿇으면서 오른발 스케이트 날을 앞쪽으로 깊숙이 들이민다. 엉덩방아를 찧고 미끄러져 나가면서도 두 팔을 번쩍 치켜드는 전이경.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던 양양(A)는 골인 직전 전이경을 밀친 행위가 실격 처리되면서 은메달도 놓치고 만다. 원혜경 동메달 획득.

1000미터 결승에서의 영광. 그러나 4년 후 1500미터 결승에서 한국 쇼트트랙은 어이없게 좌절을 맛본다. 2002년 2월 21일, 솔트레이크시티 아이스센터. 출발선에서 목을 좌우로 흔들며 긴장을 푸는 김동성의 모습에서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경기 시작. 안톤 오노의 레이스는 철저히 김동성에게 맞춰져 있었다. 김동성이 치고 나가면 속력을 내서 따라 붙었고, 거꾸로 속력을 줄이면 김동성 뒤에 처졌다. 7바퀴를 남겨 놓고 하위권에 처져 있던 김동성은 엄청난 스피드로 맨 앞에 나서 레이스를 주도하기 시작한다.

3바퀴가 남은 상태에서 엄청나게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선수들. 선두는 여전히 김동성. 5위로 달리고 있던 오노가 안쪽으로 치고 들어오며 한 사람 한 사람씩 따돌리더니 김동성 뒤에 바짝 붙는다. 마지막 코너. 막판 추월을 시도하던 오노가 갑자기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치켜든다. 오른손을 앞으로 쭉 내밀며 결승선을 통과하는 김동성. 환호하는 한국 응원단. 미국 관중들의 야유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모 방송국 캐스터의 입에서는 "말도 안됩니다"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캐스터 (뭔가 잘못될 것 같다고 느낀 듯)자- 태극기를 들고 한바퀴 돌아야 됩니다. 김동성 선수에게 금메달이 주어질 듯 싶습니다.
(태극기를 들고 링크를 돌던 김동성 선수 전광판을 올려다본다)
캐스터 (갑자기 흥분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이며) 어---이게 웬일입니까? 김동성 선수에게 파울을 줍니다.
전이경 말도 안됩니다.
캐스터 아---이건 말도 안됩니다. 이건 말도 안됩니다. 안톤 오노에게 금메달을 줍니다. 이건 말도 안됩니다. 미국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전이경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캐스터 아...자존심이.
전이경 김동성 선수, 얼음판에 드러 누워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 일간스포츠 2월 22일자


(문제의 장면이 흐른다)
캐스터 자 여기서, 안톤 오노가 오른쪽 쳤어요. 쳤고! (답답한 듯)계속 쳐. 김동성 가만있었습니다.
전이경 이건 실격이 아닙니다. 이건 실격이 아닙니다.
캐스터 김동성이 뭐를 잘못했습니까. 아- 이건 말도 안됩니다. 자- 보세요. 김동성은 하나도 잘못한 게 없어요. 뭘 잘못했습니까. 가만있었습니다. 안톤 오노의 제스처, 할리우드 액션입니다. 할리우드 액션입니다. 아--- 말도 안됩니다. 김동성의- 김동성의 금메달을 빼앗아 갑니다.
전이경 정말 말도 안됩니다.
캐스터 미국이 빼앗아 갔습니다.
전이경 이건 참으면 안됩니다.
캐스터 정말 이건 말도 안됩니다. 미국이 금메달을 빼앗아 갔습니다.

배구 국가대표 선수의 죽음

1995년 오늘, 애틀란타 올림픽 배구 국가대표팀 김병선(22세) 선수가 숙소에서 갑자기 쓰러져 숨지는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다. 사인은 대동맥 파열. 당시 언론은 무리한 국내외 경기 출장으로 선수가 지나친 혹사를 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현대자동차서비스에 입단, 실업초년생이었던 故 김병선 선수는 대표팀 부동의 장신 센터로 각광받는 유망주였다. / 이정환


분노는 거세게 터져 나왔다. 네티즌들은 솔트레이크 올림픽 공식 사이트, CNN 사이트 등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오만한 오노와 미국에 대한 성토가 확산됐고, 'Fucking U.S.A.'가 곳곳에 번져 나갔다. 국내 체육계의 미온적인 대처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국 선수단의 폐막식 보이콧 철회 성명으로 스스로 비난을 자처한 김운용 회장은 얼마 후 대한체육회 10여년 권좌에서 스스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2002월드컵 미국전에서 대표팀은 '쇼트트랙 세리모니'로 상처받은 자존심을 어루만져줬다.

국민적 스타로 떠 오른 김동성은 2002년 3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6관왕에 올랐으나, 무릎 부상으로 오랫동안 공백기를 가져야 했다. 솔트레이크에서 좌절을 겪은 지 꼭 1년만인 2월 20일, 김동성은 동계 체전에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의미 있는 복귀전을 치른 김동성은 각오를 묻는 질문에 "오노보다 월등한 실력을 갖춰 반드시 2006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고 답했다.

한국 최초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회 선수위원으로 활동했던 전이경은 얼마 전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유치위원으로 위촉됐다. 동계아시안게임부터 스승인 전명규 감독에게 대표팀 지휘봉을 넘겨받은 알베르빌 올림픽 메달리스트 김기훈과 이준호는 각각 남녀 사령탑으로 후배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44년만의 첫 금메달. 세계를 놀라게 한 스케이트 날 들이밀기. 빼앗긴 금메달. 비록 같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영광과 좌절의 하루를 보냈던 주인공들, 그들은 한국 쇼트트랙 역사의 또 한 페이지를 준비하고 있다.
2003-02-21 10:06ⓒ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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